글쓴이: 윤효원(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1. 반공 노동운동, 말레이시아노총(MTUC)의 탄생
2차 대전이 끝났지만, 말레이시아는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남았다. 영국군사정부는 공산당의 노동조합 장악을 막고 반공주의 노동조합을 이식하기 위해 1945년 영국의 철도노조 간부인 존 알프레드 브래지어를 말레이시아로 불러 반공주의 노동조합 세력을 만들었고, 1946년 노동조합 등록제를 시행했다.
1947년 말라야공산당의 영향력 하에 있던 82개 노동조합이 범말라야노동조합연맹(PMFTU)을 결성했다. 출범 당시 PMFTU 조합원 수는 26만 명을 넘어 전체 노동자의 과반과 조직 노동자의 85%를 차지했다.
공산주의 노동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영국군사정부는 1948년 6월 12일 PMFTU의 등록을 취소하고, 며칠 후 비상사태를 선포한데 이어 7월 23일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00개가 넘는 노조의 등록이 취소됐고, 합법적인 공간을 상실한 공산주의 성향의 노동운동가들은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다. 12년 동안 이어진 비상사태는 1960년 7월 31일에서야 해제되었다.
공산당 계열의 노동조합운동이 불법화되자, 영국군사정부에 등록된 1949년 1월 노조 수는 163개(조합원 수 68,814명)로 축소됐다. 이 중 80개 노조가 파견한 대의원 160명이 1949년 2월 말라야노동조합대회를 열었다. 1950년 3월 열린 제2차 대회에서는 "사용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식민정부에 협조한다."는 내용이 개회 연설에서 선언되었다. 제2차 대회는 전국 중앙 조직을 지향하는 말라야노동조합협의회(Malayan Trades Union Council) 출범을 결의하였다.
1957년 8월 말라야, 북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로 이뤄진 말라야연방이 공식적으로 영국에서 독립했다. 새로운 상황에 맞춰 그해 12월 열린 제8차 대회에서 말라야노동조합협의회는 말라야노동조합회의(Malayan Trades Union Congress)로 조직명을 변경했다. 더 통합되고, 더 강한 전국 중앙 조직을 지향한 것이다. 1963년 '말라야'를 '말레이시아'로 바꾸어 지금 말레이시아노총의 공식 명칭, 즉 말레이시아노동조합회의(MTUC)가 완성되었다.
2. 말레이시아의 노동 억압 체제
공산주의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반공주의 노동운동의 이식은 자유롭고 자주적인 노동조합 활동의 억제로 이어졌다. 그 결과 말레이시아의 노동 체제는 지금도 대단히 억압적이다. 1946년 도입된 노동조합 등록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정부의 허가 없는 노동조합 결성은 불법이다. 등록 허가 과정에서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정부는 노동조합 조직 범위를 결정한다. 그 결과, 산업별(industry-wide) 노조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업종별(trade-wide) 노조만 행정적으로 허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속산업이다. 말 그대로 금속(metal)만 조직이 허용되는 노조(MIEU), 전기업만 조직이 허용되는 노조(EIWU), 자동차부품조립업만 조직이 허용되는 노조(NUTEAIW), 비철금속업만 조직이 허용되는 노조(Non-Metallic)가 각각 존재한다. 전자업노조(EIEU)는 전국을 포괄하는 노조(national union)가 아니라 동서남북 4개로 쪼개 지역노조(regional union)로 분리한다는 조건으로 2009년에야 첫 등록 허가가 나왔다. 전자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는 100만명에 이르는데, 거대 노조의 출범 가능성을 애초부터 봉쇄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관철된 것이다.
정부 허가와 더불어 노동조합 결성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법적 장애물은 노동조합에 대한 종업원 인정 투표다. 사업장 안에서 이뤄지는 비밀투표에서 사용자와의 고용관계가 확인된 재직 종업원 과반수의 동의(50%+1명)를 얻어야 노동조합의 대표권이 인정된다. 종업원 수 계산에는 외국인 노동자까지 포함된다. 비밀투표에서 과반을 얻더라도 사용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으며, 정부 역시 이런 저런 근거를 들어 노조에 대한 승인과 등록을 거부할 수 있다. 정부로부터 등록증을 받은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단체교섭 상대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법정 소송에 들어가거나 조합비 일괄 공제(check-off)를 거부하는 사용자도 늘고 있다.
정부는 '공공 질서'를 이유로 노동조합 활동을 최대 6개월간 정지시킬 수 있고, 노동조합 등록을 취소하고 노조 임원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1967년 제정된 산업관계법(Industrial Relations Act, 한국의 노동관계법에 해당)은 채용, 감원, 해고, 복직, 진급, 배치 전환, 업무 배정, 신기술 도입 등을 쟁점으로 한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불법화함으로써 노동조합의 권한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이에 따라 동정파업과 연대파업, 총파업은 허용되지 않으며, 노동조합 인정 거부나 불법적인 해고에 대항한 파업도 불법으로 간주된다. 보건, 교육, 운수 등은 "필수사업"으로 묶여 파업이 제한된다. 불법파업을 주도한 노조 임원은 벌금형과 징역형에 처해진다. 정부가 불법으로 선언한 파업에 참가한 평조합원은 노조원 자격이 자동 박탈되며, 정부의 허가 없이는 향후 어떠한 노조 활동도 하지 못한다.
1981년 출범한 모하메드 마하티르 정권은 '동방 정책(Look East)'을 추진하면서 일본 모델을 전파했다. 그 결과 노동정책에서도 노동규율 강화와 산업평화 정착이 강조되고, 기업별 노조주의가 권장되었다. 그 연장선에서 국제금속노련-일본협의회(IMF-JC)와 말레이시아 노동조합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1989년 법 개정으로 초기업단위 노조가 이미 존재하는 업종에서도 기업별노조(in-house union) 설립이 허용되었다. 그렇다고 산업이나 업종은 물론 사업장 단위에서 복수노조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업종노조를 탈퇴하여 기업별 노조를 만들거나, 기존 노조가 존재하지 않는 무노조 사업장에서 기업별 노조를 결성할 자유만 허용된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 안에는 노동부라는 이름의 부서가 없다. 인간자원부(Ministry of Human Resources)가 노동 문제를 다룬다. 이름이 다는 아니지만, 노동자를 인격체가 아닌 광물이나 석유 같은 자원으로 바라보면서 정책을 집행하는 말레이시아의 현실을 드러낸다. 단결권 등 노동권에 대한 제한은 장관도 아닌 일개 관료(노동조합국장)에 의해 결정된다. 경영, 집행, 보안, 기밀 등의 4개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노동조합 가입이 제한된다. 이 4개 업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 권한도 노동조합국장이 독점적으로 행사한다.
3. 말레이시아 노동조합의 현황과 과제
2017년 말 현재, 말레이시아 인구는 3,230만 명이며, 그 중 10%가 넘는 330만 명이 외국인이다. 1,467만 명이 고용 상태에 있으며, 경제활동참가율은 68.2%, 실업률은 3.4%이다. 임금을 받고 일하는 유급 노동자 수(말레이시아 국적자)는 800만 명이다(서비스업 480만, 제조업 210만, 건설업, 130만, 농업 40만, 광업 8만 등). 여기에 외국인 노동자 200만 명을 합치면, 말레이시아의 노동계급 수는 10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2016년 11월 30일 현재, 말레이시아노총(MTUC)은 137개 노조(조합원 313,826명)를 산하 조직으로 거느리고 있다. 이 중 34개가 초기업 단위의 업종별 전국 노조이고, 82개가 기업별 노조, 15개가 주(state) 단위 노조, 6개가 지역별 노조(4개 전자 노조 및 2개 섬유 노조)다. MTUC는 노동조합법이 아니라 직능단체법(Societies Act)의 적용을 받는다.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가진 노동조합이 아니라 이익집단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가진다.
인간자원부 노동조합국 통계를 보면, 2017년 6월 현재 738개 노동조합에 866,612명 조합원(여성 386,163명, 여성 비율 44.6%)이 등록되어 있다. 이중 민간부문 노조는 486개로 조합원 수는 358,432명(여성 120,542명, 민간부문 조직 노동자 중 여성 비율 33.6%)이었다. 이를 거칠게 2016년 말 MTUC 산하 노조 수와 비교해 보면, 601개 노동조합이 MTUC와 무관한 독립노조(independent union)다. 이 중 상당수는 휴면노조(dormant union)이거나, 조합원 수 100~299명의 소규모 기업별노조로 추정된다.
MTUC와 별도로 공무원, 교사, 공공부문 종사자들의 노동조합 상급단체로 공무노동조합회의(CUEPACS)가 있다. 교원노조(NUTP)등 일부 공공부문 노조들은 MTUC와 CUEPACS에 이중으로 가입되어 있기도 하다. 정부 통계상 전체 조직 노동자(organised labour)의 41.4%가 민간부문에 속했고, 58.6%가 공공부문에 속했다. 공공부문에 속한 조직 노동자 508,180명 중 52.3%(265,621명)가 여성 조합원이었다. 공공부문 역시 휴면노조가 상당수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말레이시아 노동조합운동의 가장 큰 도전은 노동자 대표성의 회복이다. 말레이시아 노동조합운동을 이끌고 있는 업종별노조의 경우 전국노조(national union)의 조직 구조를 갖고 있으나 사업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단체협약이 체결되어 있는 경우 조합비 일괄공제 제도를 통해 조합비가 전액 중앙으로 집중되지만, 교육 등 현장 조합원을 위한 활동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참고로 조합비는 임금의 1% 같은 정률제가 아니라, 임금 수준에 상관 없이 누구나 동일한 고정된 액수, 즉 정액제로 거둬진다. 보통 월별로 7~10 링깃, 우리돈 1930~2750원 정도로 임금 총액의 0.5%도 안 된다). 현장 조합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중앙 간부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국노조는 현장 단위노조의 통제 없이 중앙 지도부와 간부 중심으로 운영된다.
두번째 도전은 기업별노조주의의 극복이다. 법제도적 압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초기업 단위 구조를 갖고 있는 업종노조들도 단체교섭과 노사관계에서는 기업별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체교섭은 중앙이 개별 기업의 사용자와 체결하는 '대각선 협약'이 주를 이룬다. 심지어 어떤 협약은 사업장 단위 노조의 참여 없이 중앙 지도부 독단으로 체결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업종이나 산업 수준의 노사관계는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세번째 도전은 사업장 안에서 노동조합 권력 자원의 확보이다. 정액제지만, 조합비 일괄공제(check-off) 덕분에 전국노조 중앙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덜하다. 하지만, 현장 단위 노조는 별도로 재원을 마련하지 않을 경우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다. 노조 중앙에서 내려오는 별도의 예산 지원이 없는 까닭이다. 대각선 교섭을 통해 사업장별로만 체결되는 단체협약은 집단적 권리(rights)보다는 개별적 이익(interests)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근자와 사무실 확보, 조합원 유급 교육시간 확보 등 노동조합 할 권리가 포함된 단체협약은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앙 간부들은 어깨에 힘을 주는 경우가 많지만, 현장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사용자의 공세와 중앙의 노조 관료에 주눅들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네번째 도전은 냉전 시대에서 유래된 반공주의와 노사협조주의의 편협함에서 벗어나 노동자 계급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태생부터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고 시비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포기한 노동조합을 우리는 '어용'이라 부른다. 말레이시아 노동조합운동은 업종은커녕 기업별로 쪼개져 있을 뿐만 아니라, 말레이계, 인도계, 중국계 등 인종적으로도 분열되어 있다. 노사관계와 사회의 이러한 분열상은 계급 의식의 형성을 방해하고 종업원 의식을 부추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적인 이념과 실천적인 노선을 정립할 과제를 말레이시아 노동조합운동은 안고 있다.
[참고 문헌]
김금수 (2016), 말레이시아노동운동사,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사이트
Zaidi, S.J.H. (1975), Malaysian Trades Union Congress 1949-1974, MTUC
Aminuddin, Maimunah (2013), Malaysian Industrial Relations & Employment Law, McGraw Hill Education
[참고 사이트]
dosm.gov.my, Department of Statistics Malaysia, Official Portal
mtuc.org.my, MTUC
www.ituc-csi.org, ITUC Global Rights Index